문학작품

바닷가 우체국 완결편(5회) (단편소설, 2002년,희란)

나누미도우미 2014. 11. 10. 07:36


바닷가 우체국


다음날 아침 우체국으로 연이의 할아버지 박영감이 찾아왔다. 마침 마을로 나가려던 황소장이 할아버지를 맞았고, 아침 커피를 마시던 미스 윤이 따뜻한 차 한잔을 할아버지께 권했다.




“황소장, 그동안 고마웠어요.”


“웬걸요. 저희가 뭐 한 게 있어야지요. 그래, 연이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다음 주면 제 아빠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어차피 우리는 너무 늙어서 그애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어요. 아무려면 우리 늙은이들 보다야 제 아빠가 자식을 거두는 게 나을 성 싶고, 또 사정도 이렇게 되고...”


“잘하셨습니다, 영감님. 연이를 떠나 보내고 나면 당분간은 허전하시겠지만, 어린 것의 앞날을 생각하셔서 잘하신 겁니다.그런데 두 분은 앞으로 어떻게 하시기루요? 어디 거처라도 정하셨는지요?”


“보상금 나온 돈과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을 합하면 그럭저럭 좀 돼요. 섬 뒤쪽 한갖진 데로 돌아가면 조그마한 움막이나마 지어서 살 정도는 될 것 같어. 마침 같이 철거되는 옆 집 장씨네가 뭍의 아들네로 가지 않고 우리랑 함게 이웃하여 벗하고 살겠다니, 적적하기도 덜할 것 같고. 뒤쪽이라 외져서 앞쪽 보다는 못하겠지만 늙은이들 사는데야 외지고 한갖지면 또 어떻소?”


“잘 되셨네요. 가끔씩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시구랴. 그리고 사실 오늘은 내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는데...”


할아버지는 미스 윤을 향해 조심스레 말씀을 꺼내시는 것이었다.


“그동안 우리 연이 편지를 잘 맡아서 전해주신 것 고맙게 생각해요, 덕분에 연이가 무엇을 원하고 소망하는 지를 알게 되었어요. 겉으로는 원망이 있는 것 같았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아빠를 그리워 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런데 기왕 하시는 김에 마지막으로 한 번 만 더 수고를 해주셨으면 하오.”


“네, 무슨 부탁이신데요, 말씀 하세요, 할아버지.”


미스 윤은 진심으로 할아버지의 부탁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우리 연이에게 답장을 한 번만 써주셨으면 하오. 부질없는 일이고,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만, 훗날 우리 연이가 자라서 좋은 추억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미스 윤과 황소장은 연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그럴게요, 할아버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는 미스 윤의 눈에는 어느사이 눈물 방울이 맺혀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이것보세요!”


연이가 집마당으로 들어서며 할머니를 소리 높여 부르고 있었다. 좀체로 시끄럽게 호들갑스럽지 않은 손녀 딸이 소리 지르며 뛰어오는 모습에 방문을 열고 나서던 할머니는 무슨일인가 싶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러니?”


“이것 보세요, 할머니. 엄마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뭐라고? 엄마에게서? 무슨 소리냐, 네 엄마에게서 어떻게 편지가 왔다는 거야?”


“정말이라니까요. 방금 전 길에서 황소장님을 만났는데 전해 주셨어요. 여기보세요, 하늘 나라 일번지 엄마로부터, 그렇게 쓰여 있잖아요.”


“어디보자. 정말이로구나. 정말 하늘나라 일번지 엄마로부터라고 쓰여 있구나.”


“드디어 내가 엄마에게 보낸 편지가 하늘나라에 도착했던거예요. 그래서 엄마가 연이에게 답장을 써서 보내신 거라구요. ”


“어디 뭐라고 쓰여져 있나부터 보자꾸나.”


“예, 할머니.”


편지 봉투를 뜯는 연이의 손끝이 떨려 왔다. 엄마에게서 온 답장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연이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연이에게.

우리 딸 연이야, 안녕. 잘지내지?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건강하시고?

엄마는 잘 지내고 있단다. 이곳은 엄마가 지내기에 아주 좋아. 따뜻하고 평온하고... 모자람이 없는 하루 하루다.


엄마는 항상 우리 연이를 생각하며 지켜보고 있단다. 연이가 얼마나 착하고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은 잘듣고 있는지.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으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지...


모든 면에서 연이는 생각보다 잘해내고 있는 것 같아서 엄마는 마음이 놓인다. 그동안 연이의 편지를 받아보며 우리 연이가 얼마나 잘자라주었는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너무 어린 네 곁을 떠나와서 늘 마음 한켠이 아팠었는데 그렇게 잘 자라주고 있는 네가 엄마는 얼마나 대견한지 모른다. 고맙다 연이야.


다른 엄마들 처럼 늘 보살펴 줄 수 없고, 함께 웃고 울수는 없다지만 엄마의 마음과 눈은 항상 연이의 곁에 있다는 것을 연이는 알지? 그래, 엄마는 연이랑 함게 있는거란다. 언제나. 늘...


아빠를 만났지? 네가 아빠를 이해하고 용서해 주는 것을 보니 엄마는 마음이 놓였다. 이제 우리 연이 다 자라서 아빠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니. 얼마나 흐믓한지 모른다. 네게 있어서 아빠가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시듯이 아빠에게도 너는 가장 큰 힘이 되는 존재란다. 아빠랑 너,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세상에서 하나뿐인 가족이니까. 엄마는 이곳 하늘나라에서 항상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언제나, 늘, 함께 ...


이것이 우리 연이에게 쓰는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구나. 그러나 연이야 잊지 말아라. 엄마는 언제나 네 곁에 있다는 것을.

 

착하고 식씩하고 건강하게 자라거라. 내딸, 연이. 사랑한다.




 

연이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몇 십번을 읽어도 지루하거나 물리지 않는 엄마의 편지. 엄마, 엄마! 연이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편지지 위로 뚝 뚝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연이가 섬을 떠나던 날을 나는 평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연이는 떠나기 전에 한참을 내 앞에 서 있었다. 연이의 손에는 분홍색 편지 봉투가 하나 들려 있었다. 가슴에 꼭 품고 서 있던 편지 봉투를 내 몸속으로 밀어 넣은 뒤에도 연이는 한동안 걸음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벙어리 장갑 낀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조심 조심 쓰다듬어 주었다. 연이의 눈에는 작은 눈물 방울이 아롱져 있었지만, 밖으로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연이는 조용히 한마디 말을 했다.


“안녕히 계세요, 엄마!”


돌아서서 터벅 터벅 선착장을 향해 걸어가는 연이의 등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연이가 떠나면서 엄마에게 쓴 마지막 편지.

 

그리운 엄마.

엄마, 이제는 정말 안녕인가 봐요.

오늘 연이는 섬을 떠납니다. 앞으로는 아빠랑 함께 서울에서 살게 됐어요.

이곳에서 지낸 3년 동안의 일을 하나도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할거예요.


바다, 파도 그리고 갈매기, 봄이면 만발하던 봄꽃, 바람, 해돋이와 석양, 심지어 폭풍우까지도. 무엇보다도 엄마와의 추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할 거예요. 엄마랑 이곳에서 살았던 적은 없지만, 이곳에서 저는 늘 엄마랑 함께 했던 것만 같아요. 엄마에게 편지를 쓰고, 그리고 답장을 받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곳에 남기로 했어요. 두 분에게는 이곳을 떠나 사신다는 것이 상상도 안되는 일인 것 같아요. 저 떠나 보내고 외로우실 두분이 걱정되지만, 방학이 되면 내려와서 함께 있어드리기로 했어요. 그때가지 항상 건강하시도록 엄마가 두분을 지켜 드리세요.


엄마, 연이는 씩씩하고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어요. 항상 엄마를 느끼며 엄마와 함게 하는 순간들임을 잊지 않고 살겁니다. 엄마의 말씀처럼 아빠를 돕고 아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엄마, 연이를 믿고 지켜봐주세요. 연이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연이는 엄마 딸이니까요.

안녕히 계세요. 사랑해요, 엄마.




 

섬마을에 어둠이 내리고 겨울이 깊어간다. 곧 해가 바뀔 것이고 봄이 올 것이다. 또 누군가가 섬을 찾아올 것이고, 또 떠나갈 것이다.


바닷가 우체국 앞에, 빨간색 옷을 입고 나는 오늘도 서 있다. 아마도 몇 년이 세월이 흘러 나는 다시 한 번 새옷을 갈아입을 것이고, 또 몇 년의 세월이 흘러 한 번 쯤 새옷을 더 갈아 입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렇게 세월이 가고, 오고... 우리들의 아이들이 또 왔다가 가고...


바닷가 우체국 앞에는 빨간색 옷을 입은 또 누군가가 지켜 서있으면서 그리운 이름들로부터 소식을 기다릴 것이다.




 

- 끝 -

(바닷가 우체국 1회 읽기)

(바닷가 우체국 4회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