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

허수아비 밀짚모자, 나무 (시, 희란)

나누미도우미 2014. 11. 4. 12:04

무명작가 희란의 시 2편(2006년작)을 소개합니다.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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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밀짚모자


 

                             (2006년, 희란)

일평생 나는

지켜내는 일만 했다

산 목숨도 아닌 주제에

우 워- 우 워-

목청께나 있는 듯 목울대 곧추세우고

뻗어봐야 두 자도 못되는 팔

고작해야 누더기 걸쳐주면서

세상은 날더러

두 눈 부릅뜨고 지켜내라고 했다

세상을 폭파시킬

대단한 화약을 도둑맞는 것처럼

호들갑떨며

우워-우워-

소리치는 법만 가르쳐줬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주인이어야 하는

원래의 이땅

나는, 세상의 요구에 길들여져 간다

 

 ... 나는 몰랐다

저들이 입혀준 누더기를 걸쳐입고

개선장군 선봉장처럼 벌판 한가운데 서는

그 순간

나는 이미 너희의 적이 되어 있었다

내 발은 걸음마를 잊어버렸다

내 팔은 퇴화해버린 날개가 되었다

한 때 친구였던 적들은

이제 더 이상 내 눈동자를 마주보려 하지 않는다

나도, 소리내어 웃는 법을

잊어버렸다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그 길 한가운데 서서

맨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기

부끄럽고, 무서워서

꾹꾹 밀짚모자를 눌러쓴다

내것이 아닌 나의 소리가

마른 가을 하늘로 오른다

워이- 워이- 워어이- 워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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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2006년, 희란)

 

난 널

포기할 수가 없어

그게

늘 내가 푸르러야 했던 이유다

살을 에이는 칼바람

한척 높이의 눈 속에서도

가난이 부끄럽지 않다

바람이 쉬어가는 무성한 그늘조차

한 때의 부귀영화

자랑이 못됨을 안다

가고 오는 모든 것들이

한 벌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사소한 일상이 되고 말더라는 것

세월이 내게 가르쳐준다

나는

풀잎이어서는 안된다

한 때 아름답고 말아버리는

저들 꽃과 같아서도 안된다

너는 아는지

떠날 때 그러했듯이

배시시 웃으며 돌아올

기다려온

어미의 나이테

 

슬픔없이 열매를 피우는

뿌리가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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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