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 밀짚모자, 나무 (시, 희란)
무명작가 희란의 시 2편(2006년작)을 소개합니다.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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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밀짚모자
(2006년, 희란)
일평생 나는
지켜내는 일만 했다
산 목숨도 아닌 주제에
우 워- 우 워-
목청께나 있는 듯 목울대 곧추세우고
뻗어봐야 두 자도 못되는 팔
고작해야 누더기 걸쳐주면서
세상은 날더러
두 눈 부릅뜨고 지켜내라고 했다
세상을 폭파시킬
대단한 화약을 도둑맞는 것처럼
호들갑떨며
우워-우워-
소리치는 법만 가르쳐줬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주인이어야 하는
원래의 이땅
나는, 세상의 요구에 길들여져 간다
... 나는 몰랐다
저들이 입혀준 누더기를 걸쳐입고
개선장군 선봉장처럼 벌판 한가운데 서는
그 순간
나는 이미 너희의 적이 되어 있었다
내 발은 걸음마를 잊어버렸다
내 팔은 퇴화해버린 날개가 되었다
한 때 친구였던 적들은
이제 더 이상 내 눈동자를 마주보려 하지 않는다
나도, 소리내어 웃는 법을
잊어버렸다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그 길 한가운데 서서
맨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기
부끄럽고, 무서워서
꾹꾹 밀짚모자를 눌러쓴다
내것이 아닌 나의 소리가
마른 가을 하늘로 오른다
워이- 워이- 워어이- 워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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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2006년, 희란)
난 널
포기할 수가 없어
그게
늘 내가 푸르러야 했던 이유다
살을 에이는 칼바람
한척 높이의 눈 속에서도
가난이 부끄럽지 않다
바람이 쉬어가는 무성한 그늘조차
한 때의 부귀영화
자랑이 못됨을 안다
가고 오는 모든 것들이
한 벌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사소한 일상이 되고 말더라는 것
세월이 내게 가르쳐준다
나는
풀잎이어서는 안된다
한 때 아름답고 말아버리는
저들 꽃과 같아서도 안된다
너는 아는지
떠날 때 그러했듯이
배시시 웃으며 돌아올
널
기다려온
어미의 나이테
슬픔없이 열매를 피우는
뿌리가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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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