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밟는 소리 / 단편소설 / 3회(최종)
※ 당초 5회 연재를 계획했으나, 3회로 연재를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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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로부터는 점심 시간 쯤에 전화가 왔다.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을 것 같아 영주에게 방송국 쪽으로 나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윤지수는 방송국 근처의 카페에서 영주를 만났다.
“어떻게 되었어요? 알아보셨나요? ”
어떻게 말을 꺼내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윤지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작고 어린 생명이 마치 자신의 피붙이나 되는 것처럼 오늘 하루종일 마음이 아프고 서글펐다. 그러나 그것이 앞에 앉은 영주의 탓은 아니지 않은가. 나쁘다면, 장회장이 나쁜 것이고, 세상이 원망스러운 것일 따름이지 않은가 말이다.
“아이가...아들이, 한 명 있었어. 몇 년 동안 가정 경제가 흔들리고 실직까지 한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아내는 작년에 가출을 한 상태였고. 며칠 전부터 아이는 폐렴을 앓고 있었대. 그래서 돈이 더 급했던가봐.”
“그래서요? 아이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다고 하던가요?”
차마 아이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전해줄 용기가 없었다. 윤지수는 영주를 안다. 누구보다 마음이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영주였다. 어떻게 그런 아버지 밑에서, 그런 재벌가의 환경속에서 저렇듯 여리고 섬세한 성품이 나왔나 싶게 영주의 마음은 약하고 심약했다. 아마도 그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영주의 어머니, 장회장의 죽은 아내의 대물림이리라 생각이 되었다.
“아이는요?...”
거듭 영주는 윤지수에게 물어왔다. 쉽게 대답을 못하는 윤지수를 보고 이미 무언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대답을 묻는 물음표의 끝이 조심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윤지수는 한재욱으로부터 들은 병원을 가르쳐 주었다.
윤지수와 영주가 카페를 나왔을 때 밖에는 검은 색 양복에 검은 안경을 낀 두 세사람의 모습이 서성이고 있었다. 아마도 영주를 좇아 온 장회장의 수족들인 모양이었다. 영주는 화가난 표정이었지만 별 반항 없이 그들이 문을 여는 차에 올라탔다. 윤지수는 멀리로 사라져가는 차의 뒷모습을 멀건히 바라보는 것으로 영주를 배웅했다.
7시 뉴스의 보도 내용에는 그 남자와 아이의 뉴스가 실려 있었다. 역시 담당은 김남호 기자였다.
“지난 수요일 저녁 방송된 내용가운데 가스통 절도범 김모씨에 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우선 수요일 방송해드렸던 내용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오늘 오전 9시 서울 병원에서 김씨의 일곱 살난 아들이 끝내 폐렴으로 숨졌습니다. 절도죄로 구속된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린 아들은 불도 들어오지 않는 냉골방에서 홀로 병마와 싸우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찰은 아들의 장례식장을 지킬 수 있도록 피의자 김모씨를 임시 석방하기로 잠정 결정하고...”
그리고 뉴스의 맨마지막에서 김남호 기자는 다음의 코멘트를 달고 있었다.
“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김모씨의 경우 극심한 생활고와 아들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불과 몇 만원의 돈을 훔친 결과 결국 아들은 아버지도 없는 차디찬 방에서 혼자서 쓸쓸히 세상과 작별을 고해야 했습니다. 몇 천억원대의 돈을 탈세 혹은 횡령하고도 일말의 양심적 가책없이 새상에 고개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불과 몇 만원에 목숨을 바꿀 수 밖에 없었던 그들 부자의 처지가 새삼스럽게 아프게 다가오는 저녁입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속언이 실제로 피부에 와닿는 현실의 한국사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다음 뉴스는 또다시 공교롭게도 K 건설에 대한 보도였다. 아마도 의도적인 편집이 작용했으리라고 볼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장회장의 분식회계장부 분석결과, 추측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액수의 돈이 행방과 출처를 모르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러한 결과를 놓고 볼 때 장회장의 비자금 혐의설은 경미한 차원에서 다루어지지 않겠느냐는 보도였다. 결과적으로 새로이 발견된 분식회계 장부의 존재는 오히려 장회장으로 하여금 이로운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셈이 되었다.
윤지수는 그제 저녁 술자리에서 오갔던 한재욱의 말이 얼핏 떠올랐다. 분식회계장부는 오히려 장회장쪽에서 흘린 미끼일 수 있다는 말. 더욱 큰 것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 작은 것을 터뜨림으로써 확실한 면죄부를 얻으려는 의도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그의 말이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퇴근하는 길에 윤지수는 한재욱 김남호 등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아이의 영정 앞에는 작은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을뿐 흔한 꽃다발이나 화환조차도 없었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아이의 사진을 바라보고만 앉아 있는 30대 후반의 남자. 화면을 통해 본 마르고 여윈 얼굴의 주인공이었다. 윤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 남자의 발을 시선 끝으로 좇아 보았다. 거기, 여전히 벌거벗은 그의 맨발이 춥게 웅크린 모습으로, 숨듯 비죽여 고개 내밀고 있었다.
일가친척도 없는지 옆에서 위로해줄만한 얼굴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방송을 타는 바람에 여러 곳의 일간지며 방송국 기자들만이 찾아와 몇번씩 후레쉬를 터뜨리고 가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럴때도 아이의 아버지는 눈동자 하나 흔들림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치 정신을 놓은 사람의 모습처럼.
그 남자의 얼굴은 세상에 지치고 힘들게 살아온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눈은 숨길 수 없이 선량하기만 했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눈빛, 분노하고 절망하며 누군가를 향해 한 없는 푸념이라도 쏟아부을지 모른다고 짐작하고 갔던 걸음이었는데도, 그의 눈빛은 하염없이 선량하기만 했다. 이제는 원망하고 절망하는데 조차도 지쳐버린 것 같은 그 눈빛. 한재욱이 다가가서 인사를 하자 얼핏 고개를 돌려 잠시 쳐다보았을 뿐 여전히 멍한 시선으로 아이의 영정만을 바라보았다. 윤지수 일행이 영정에 절을 마치고 잠깐 앉아 있다 인사를 하고 일어서려는데도 여전히 그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그들이 일어서서 자리를 뜨려는 순간, 남자는 한재욱의 바지를 살며시 붙들어 세웠다. 여전히 아이를 바라만 보는 텅빈 시선 속에 눈물 방울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는 누구에게인지 모를 한 마디를 속절없이 내 뱉었다
“딱, 따라가고 싶기만 하네요. 저 녀석 따라서 그저 함께 갈 수만 있었으면 싶으네요. 소리내어 우는 것조차 이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울지도 못하겠어요...”
그는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쓰윽 문질러 닦아낼 뿐이었다.
병원을 나서면서 윤지수는 문득 영주를 본 것도 같았다. 아니 영주를 보았다기 보다는 영주를 뒤따르는 검은 양복의 검은 안경을 낀 장회장의 사람들을 본 것 같다는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어쩌면 자신의 생각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고 고개를 저어 외면해 버렸다. 낮에 영주를 만났을 때 병원이름과 아이의 이름을 말해주었으므로 어쩌면 영주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윤지수의 한켠 마음이 빚어낸 환상이라고 생각하며 병원을 나섰다.
한재욱, 김남호 기자와 어울려 밤늦도록까지 술자리에 있었다. 술을 체질적으로 많이 마시는 편이 못되었으므로 주로 그들이 하는 양을 바라보며 함께 어울린다는 정도였지만, 유난히 한재욱과 김남호가 술이 과하다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주었다. 두 사람 다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마치 술에 원수진 사람들처럼 연거푸 술잔만 들이붇다가 취해가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 윤지수는 혼자서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로 돌아왔고, 아마도 두사람은 어딘가로 가서 다시 2차 3차를 할 것처럼 보였다.
택시를 타고 집을 향해 출발할 무렵 눈발이 굵어져 있었다. 기사는 어이참, 오늘도 눈이 많이 내리려나 봅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면 내일도 영 운전하기가 힘들겠는걸요. 올해는 웬 눈이 이렇게 많은 지, 원...푸념 섞인 한마디를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너무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전날밤도 한재욱으로부터 연락을 기다리느라 뜬눈으로 지새다시피 했던 터라 피곤은 한없이 깊었지만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해 뒤쳑였던 것 같다. 그러다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결에 윤지수는 전화수화기로 손을 뻗어 들었다. 전화는 한재욱으로부터 걸려온 것이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을텐데 어느 사이 한재욱은 잠이 깬 목소리였다. 게다가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윤지수, 지금 잠을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무슨 일이 난 줄이나 알어?”
“무슨일이 났는데, 왜그래?”
시간을 보니 7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일어날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윤지수는 커튼 너머의 창밖을 건너다 보았다. 옆 건물의 옥상 지붕으로 수북이 쌓인 눈이 어젯밤 많은 적설량을 나타내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야, 장영주가 죽었어!”
윤지수는 순간 벌떡 침대에서 일어섰다. 뭐라고,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가?
“장영주가 죽었다고. 어젯밤에 장영주가 눈길에서 차에 치어 죽었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교통사고라니?”
“교통사고가 아니야.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여 죽었어. 그런데 그게, 사고라기 보다는 자살인 것 같아. 아무튼 빨리 나와 봐라.”
어떻게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 입었는지 모르게 허겁지겁 매무새를 단장하고 방송국으로 나갔다. 한재욱은 미리 윤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차근차근 잘 설명해봐. 장영주가 죽다니, 왜? 아니,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장영주가 길에서 차에 치여 비명횡사하도록 도데체 그를 그림자처럼 좇고 있던 경호원들은 무얼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나도 그게 이상해서 자세히 알아봤는데 확실히 길에서 차에 치여 비명횡사한 거였어. 그것도 이상한게, 옷도 허술하게 입고 있었는데다 더구나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드래. 어젯밤 그렇게 눈이 많이 쏟아지는데. 그것도 장회장의 집에서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일어난 사고였다는데 말이야.”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는 말에 윤지수는 가슴이 덜컥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며칠전 자신이 보도했던 뉴스의 내용이 실시간처럼 자신의 눈앞을 스쳐지나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30대 후반의 허름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가스통을 훔치기 위해 남의 집 마당을 밟고 있었다. 그 남자는 맨발에 얄팍한 여름 슬리퍼 차림이었다. 카메라가 클로즈업 시켜 잡았던 그의 맨발은 눈에 젖어 발갛게 동상이 올라 있었다.
그날 오후 석간신문의 톱기사란에는 ‘K 건설의 진짜 숨겨진 분식회계장부 발견’이라는 기사가 각 신문의 일면 머릿기사를 차지하고 있었다. 7시 뉴스에서 윤지수는 다음의 내용을 보도하고 있었다.
“엇그제 발견된 K 건설의 분식회계장부는 장회장쪽에서 일부러 흘린 가짜 분식회계장부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오늘 오후 진짜의 분식회계장부가 발견되면서 나타났는데, 진짜의 분식회계장부를 경찰에 넘긴 사람은 오랫동안 장회장의 측근 중의 측근으로 알려진 최희석 비서실장입니다. 최씨는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장회장의 잘못된 처신에 자신이 더 이상 동조를 할 수 없음을 느껴 왔으나 그동안 장회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져버릴 수가 없어 갈등하던 끝에 결국 진실을 밝히기로 하고 결단을 내렸다고 겸찰에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편 최씨에 따르면 자신은 이러한 진실을 폭로하기 직전 장회장과의 독대를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고 하는데, 장회장은 최씨의 결심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진짜의 분식회계 장부를 토대로 장회장의 그간 비자금 축적 과정을 보다 빠르고 명백하게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그동안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K 건설 장익주 회장의 비자금 의혹설은 현실로 드러났으며 향후 수사의 진전이 있을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오늘 새벽 5시 서울 시내 한 거리에서 뺑소니 차량에 치여 장회장의 외동딸인 장영주양이 현장에서 즉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장회장으로서는 기업인으로서의 자신의 입지가 무너짐과 동시에 가족의 불운을 함께 겪는 겹상사를 당하였는데, 일부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장회장의 심경의 변화를 가져와 오늘 오후 진짜 분식회계장부를 넘겨주게 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서울에 눈이 많이 내렸다. 방송국을 나서기전 윤지수는 현관 앞 복도 끝에 서서 한동안 창밖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다 보며 서있었다. 선뜻 저 눈길을 밟고 걷는다는 게 두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지수는 잠시 생각에 젖어들었다. 이제 어디로 갈것인가. 방금전 아나운서실 앞에서 마주친 한재욱의 말이 떠오른다.
“장영주의 시신은 집으로 옮겼다고 하더라. 장회장이 그랬대. 큰 아들은 행방불명 되는 바람에 집에서 거두지 못했고, 둘째인 영준이도 객사하는 바람에 병원에서 보냈는데, 영주만큼은 집에서 재워서 보내고 싶다고.”
윤지수는 현관문을 열고 방송국 마당으로 발을 내디뎠다. 뽀드득 뽀드득... 발끝에서 밟히우는 눈소리가 유난히 크게 귀를 울렸다.